[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보따리 작가’ 김수자(68)가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한옥에서 ‘호흡’한다.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였던 전통 한옥 선혜원(鮮慧院)이 문을 열고 첫 전시로 김수자를 초대해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 1.0’을 선보인다.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세계적으로 활동해온 김수자의 작품이 한국 전통 건축물에 설치되는 첫 사례이자, 그의 서울 복귀전이다.
지난 7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 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한 김수자는 회화와 바느질,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집과 정체성, 그리고 인류 보편의 문제를 사유해 온 세계적 작가다. 1990년 첫 개인전 이후 ‘이동’과 ‘몸’을 주제로 전통 보자기와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왔다.
◆선혜원, 또 다른 보따리
2일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서 만난 김수자는 “선혜원은 또 다른 보따리”라고 말했다. “‘경흥각의 문을 여는 순간,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거울 작업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통 건축과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1990년대 양동마을에서 시작된 보따리 작업 이후, 그는 줄곧 건축 속 새로운 설치를 꿈꿔왔다. “보따리의 건축적 해석이 이번 ‘호흡’의 출발점”이라는 설명처럼, 건축 자체는 하나의 보따리로 재해석되고 관객은 그 안에서 자연스레 퍼포머가 된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경흥각 바닥을 거울로 채운 ‘호흡–선혜원'(2025)은 수백 년 된 소나무로 만든 한옥의 천장, 서까래와 지붕을 반사시키며 실제와 허상이 겹쳐지는 체험을 만들어낸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관객은 거울 위를 걸으며 발 딛고 선 자리가 또 하나의 하늘이 되고, 자기 자신조차 허공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압도감을 마주한다.
조선시대 왕실의 품격을 간직한 전통 한옥 전각 경흥각은, 김수자의 거울 설치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흐르며 사유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한옥 공간의 거울 작업은 외국인 관객이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전통 건축이 품은 시간성과 거울 설치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압도감은 세계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한국적 초현실’이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을 ‘거울 왕국’으로 만들었던 ‘호흡’과는 또 다른 울림이다.
◆보따리, 기억의 껍질
김수자는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자기 자신은 비추지 않는다.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매체”라며, 이를 ‘펼쳐내는 바늘(Unfold Needle)’에 비유했다. 덮는 보따리와 펼치는 바늘 사이에서 인간은 감춤과 드러남 사이를 호흡한다.
그는 “‘호흡’은 결국 인간의 허스크(husk), 즉 몸의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담는 껍질”이라며 “보따리와 호흡은 물질과 비물질, 기억과 시간, 삶과 패션(의복), 그리고 몸을 하나의 구조로 묶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삼청원 지하 복도에 놓인 3개의 ‘보따리’, 독일 마이센 도자기와 협업한 ‘연역적 오브제–보따리'(2023), 평면 작업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2023) 등은 이러한 철학을 확장한다. 소박한 보따리는 결국 이주와 디아스포라, 삶의 전환기를 담아내는 이동식 보금자리다. 감싸는 행위는 곧 시간과 이동, 만남에 대한 명상이 된다.
“숨 쉬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하는 증거다.”
김수자가 선혜원에서 펼친 ‘호흡’은 결국 우리 삶의 근원적 리듬을 되묻는다. 3일 개막하는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로 출발해 인재 교육의 장으로 쓰이다, 2025년 4월 그룹 연구소 겸 컨벤션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SK는 역사적 공간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했고, 김수자의 개인전이 그 첫 무대를 장식했다.
무엇보다 SK가 전통 한옥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대 예술과 접목해 대중에게 개방한 것은 기업 문화공간의 모범적 사례로 읽힌다. 전통과 현대, 사적 공간과 공공의 영역을 이어주는 플랫폼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낸 셈이다.
한편 이번 김수자 전시는 ‘프리즈 서울’ 기간 지역 연계 행사 ‘삼청나잇’과도 연결된다. 4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선혜원을 야간 개방해 한옥의 정취 속에서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이 예정돼 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열린다. 네이버에서 ‘선혜원’을 검색해 예약하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