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한국과 일본이 현대사 안에서 여러가지 파도를 겪었습니다. 저희는 예술인으로서 이런 파도를 넘기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연기합니다. 그러면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강제징용 문제를 다룬 일본의 노가쿠(能樂) ‘망한가(忘恨歌)’ 연출가 시미즈 간지는 21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창극중심 세계음악극축제’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노가쿠는 650여 년간 전승되어온 일본의 전통 가면 음악극이다.
세계음악극축제는 우리나라 창극을 중심으로 동시대 음악극의 흐름과 현재를 조망하는 자리로, 올해 처음 열린다. 국립극장은 첫해를 맞이한 이번 축제에서 ‘동아시아 포커싱’을 주제로 한·중·일 3국의 전통 음악 기반 음악극 총 9편을 소개한다.
시미즈 간지는 한일 양국간 민감한 이슈인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다룬 ‘망한가’를 소개하며 이날 간담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망한가’는 일본 전통 노(能) 공연집단 노후카와 고창농악보존회 임성준 연주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망한가농악단이 합동 제작한 음악극이다. 1993년 다다 도메오라는 일본의 한 면역학자가 조선 강제 징용자의 아내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 당한 남편이 한 탄광에서 사망하고, 한국에 있는 아내가 유품을 받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춤으로 달래는 내용이다. 백제가요 ‘정읍사’의 시어를 빌어 시대를 초월한 위로와 성찰의 메시지를 전한다.
연출을 맡은 시미즈 간지는 아내 역할로도 출연한다. 망한가가 한일 양국의 불편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만큼 그의 심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터. 그는 “한국분들께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될지 굉장히 긴장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현실 세계에서 징용 문제가 전혀 해결됐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저희가 더 앞서서 이런 것들을 다뤄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힘줘 말했다.
망한가는 형식을 중시하는 일본 전통예술이지만, 한국의 농악을 작품에 접목했다. 시미즈 간지는 2019년 한국 농악 연주자들과 교류를 시작해 2022년 일본 국립노악당과 2024년 도쿄 좌코엔지 극장에서 ‘망한가’를 두 차례 공연했다. 이번 ‘세계 음악극 축제’를 통해 한국에서 첫선을 보인다.
노후카 측은 이번 공연을 위해 600년 이상 된 노가쿠 가면 4점을 일본에서 직접 공수, 간담회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시미즈 간지는 “망한가에서 사용하는 가면을 갖고 왔는데, 600년 이상 된 가면이다. 이 정도의 가면이 아니면 이번 작품에서 쓸 수 없다고 생각해 가지고 왔다”며 “남편을 그리워할 때 북소리가 들리는데, 이때 북소리가 한국의 타악기 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한국의 농악하는 분들이 출연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전통 연희극 배우가 이런 소재를 가진 작품을 연기하는 것을 편견 없이 봐달라”고 당부했다.
‘창극 중심 세계 음악극 축제’에서는 망한가 외에도 동아시아 3개국의 다양한 전통 음악극이 펼쳐진다.
2023년 홍콩 아츠 페스티벌(HKAF)에서 제작한 광둥 오페라인 ‘죽림애전기’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홍콩 영화제를 비롯한 다수의 시상식에서 수상한 극작가이자 연출가 레이몬드 토 콕 와이(Raymond To Kwok-wai)가 극본을 맡아 평단으로부터 “최근 보기 드문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국내 초청작으로는 제주 무속신화인 ‘생불할망본풀이’를 소재로 한 ‘종이꽃밭: 두할망본풀이’, 조선 말기 고전소설 ‘정수정전’을 창작극으로 재탄생 시킨 ‘정수정전’ 등이 무대에 오른다. 이밖에 국립극장 개막작이자 인기 창극인 ‘심청’, ‘다정히 세상을 누리면’도 이번 축제에서 관람할 수 있다.
박인건 국립극장장은 “창극이 과거엔 단순히 부채들고, 고수와 무대를 했지만 연기, 대사, 춤이 들어가면서 해외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있다”며 “국내에서 반응이 좋아야 아시아로 나아갈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세계에서 주목받는 창극이 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 달 3일 개막하는 ‘창극중심 세계음악극축제’는 9월 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 하늘극장에서 진행된다. ‘망한가’는 17~18일 하늘극장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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