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2023년 강릉 산불도 경험했지만 이번(영남권 산불)처럼 며칠 동안 불길이 잡히지 않아 사람들을 밤낮없이 괴롭혔던 적은 없었어요.”
지난 일주일간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기세를 떨쳤던 화마는 국가 유산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운사, 산불이 휩쓸고 간 천년고찰은 폐허로 변했다.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잘 보존돼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가운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00년 역사의 고택도 화마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국가유산청이 지난달 21일부터 지난 4일까지 집계한 산불 관련 국가유산 피해는 총 35건이다. 국가지정 문화유산은 보물 3건, 명승 4건, 천연기념물 3건, 국가민속문화유산 3건 등 13건이다. 시도지정 문화유산은 유형문화유산 4건, 기념물 3건, 민속문화유산 6건, 문화유산자료 9건 등 22건에 달했다.
그러나 한때 소실됐다고 알려진 안동 만휴정이 기적적으로 ‘생환’했고, 옮길 수 있는 불상과 탱화, 현판 등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불에 약한 목조건물엔 전면을 방염포로 덮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담은 문화유산을 화마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산불 현장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달 23일 국가유산 재난 위기 경보를 ‘심각’ 단계로 발령했다. 사상 첫 조치다. 국가유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직원 750명을 산불 현장에 급파했다.
국가유산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 영주 부석사에 대한 긴급 조치에 나섰다.
안동 봉정사와 영주 부석사에서는 유물들을 긴급 이송 조치했고 바로 앞까지 산불이 번진 하회마을, 병산서원에서는 민속유산팀과 역사유적정책과 직원들을 보냈다. .
현장에 나갔던 국가유산청 직원은 뉴시스와 만나 “‘심각’ 단계를 발령한 게 처음이고 자연유산이든 명승이든 직접적으로 산불이 위해를 가하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었다”며 “강릉 산불도 경험했지만, 이번처럼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확산하면서 밤낮없이 사람들을 이토록 괴롭혔던 산불은 이전엔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현장에 급파된 국가유산청 직원 750여 명은 현장에서 유물소산, 피해 현황 모니터링, 방재 작업으로 나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산불이 확산하면서 본청 직원들 뿐만 아니라 소속 기관들 특히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과 산하에 있는 지방 연구소 직원들까지 모두 현장 유물 이송 작업에 투입됐다.
특히 국보 극락전, 대웅전, 보물 보조관음보살좌상 등 국가유산 다수를 소장한 봉정사에서는 전체 길이가 8m가 넘는 대형불화까지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25일 밤 11시께 5t짜리 무진동 차량을 동원했다.
직원 수십명이 밤새 유물들을 일일이 포장해 다음 날 아침 6시께 비로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 안전하게 옮길 수 있었다.
부석사 경우에도 영주시가 1t 무진동 차량으로 영주관 내의 소수박물관 등으로 보물 등 중요 유물들을 소산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준비한 1t 무진동 차량과 연구원 직원들이 부석사에 대기했다.
지난 28일까지 안동 봉정사를 비롯해 부석사, 의성 고운사 등 주요 사찰과 종가 소장 유물들에 대한 긴급 소산 조치로 동산 유물 24건 1581점이 인근 박물관 수장고 등으로 옮기는 작업을 마쳤다. 주요 불상, 탱화, 현판 등을 옮긴 후에 봉정사와 부석사 등 사찰은 방염포 처리를 이어갔다.
화마가 코앞까지 다가온 안동 병산서원과 하회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있어 소방헬기가 물을 퍼다 나르고, 마을 내 소화전도 다 열었다. 병산서원에는 소방차 2대가, 하회마을에는 소방차 5대가 대기했다.
불씨가 날아 올 때 서원 건축물의 문창살, 창호지 등 화재 취약 부분에 불씨가 옮겨붙지 않도록 수시로 물을 뿌려댔다. 살수 작업이 잠시 중단되면 직원들은 피해 여부를 확인하고 주변에 방화선을 확인했다.
천연기념물과 명승이 있는 곳은 자연국과 문화유산국 직원들이 나가 있었다. 직원들은 현장을 계속 돌면서 확인하고 화선이 다가오면 국가유산청 상황실을 통해 중앙통제본부로 연락해 지원을 요청했다.
국가유산청은 현재까지 재난위기 ‘심각’ 단계를 유지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현장에 나갔던 직원들은 불이 넘어오는 상황에도 ‘물 한 바가지라도 더 뿌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철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라며 “거대한 화마 앞에서도 철수하지 못하고 끝까지 현장에 남으려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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