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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틈에서 빛으로’…알록달록 돌아온 박은선, ‘치유의 공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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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룬 구슬이 색색의 빛을 낸다. 멀리서 보면 알사탕처럼 가볍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묵직하다. 대리석이다. 단단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달라졌다.

“그때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깨달았어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결국 작품뿐이었죠.”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췄던 시기, 조각가 박은선은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의 집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멈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절망의 시대 속에서 희망을 전하기 위해 돌에 빛을 심기 시작했다.

‘무한 기둥–확산(Colonna Infinita–Diffusione)’은 조명이 되어 빛을 낸다. 대리석 구 내부에 LED 조명을 넣어, 돌의 결 사이로 은은히 스며드는 빛을 구현했다. 자연석이 인공의 빛을 걸러내며 만들어내는 조각의 광채는 부드럽다. 작가는 “가짜가 아닌 진짜 희망의 빛”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조각은 사람과 나누는 일”이라 말한다. 팬데믹 이후 그의 작품은 ‘무한’보다 ‘공유’를 향했다.

“조각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겁니다. 나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는 세계로 열려야죠.”

11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조각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그리고 존재를 통해 다시 희망을 이야기했다.

12일부터 여는 박은선 개인전은 2023년 이후 국내에서 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자, 2008년 인사아트센터 전시 이후 17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다. 대리석, 브론즈, 알루미늄으로 변주한 조각 작업들을 비롯한 조각작품 22점과 회화 작업 19점까지 총 41점을 선보인다.

◆ 돌의 틈, 숨통이 되다
박은선은 대리석과 화강암을 층층이 쌓고 깨뜨려 틈을 만든다. 그에게 그 틈은 단절이 아니라 삶의 숨통이자 빛의 통로다.

“멀쩡한 돌을 깨뜨리고 틈을 만드는 건 나뿐일 겁니다. 하지만 그 틈이 바로 생명의 숨입니다.”

전시장 입구에는 높이 3m 30cm의 대형 신작 ‘Generation–Evoluzione(생성–진화)’가 우뚝 서 있다. 균형과 상승의 조형미를 품은 이 조각은 인간의 성장과 회복을 상징하며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세 개의 구가 세워진 화강암 조각은 무거워 보이지만, 각각 따로 움직이며 아슬아슬한 긴장을 만든다.

대표작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은 두 가지 색의 돌을 반복적으로 중첩해 만들어진 수직적 조형물이다. 그가 쌓고, 깨고, 다시 붙이는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는 균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 위해서다. 번갈아 쌓인 대리석의 줄무늬는 리듬이 되고, 일부러 만든 틈은 해방의 공간이 된다.

◆ 벽의 여백을 본 조각가, 회화를 시작하다
“조각이 공간을 다 채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벽이 비어 보였어요.”

그가 회화를 시작한 이유다. 박은선에게 캔버스는 또 하나의 돌, 또 하나의 조각 재료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보다 던지고, 붙이고, 뜯어내며 조각하듯 회화한다.

이번 전시의 먹화 신작 ‘Untitled’는 수직적 기둥의 형태를 평면에 옮겨온 작품이다. 마(麻)로 짠 캔버스 위에 먹이 자연스럽게 번지며, 물성과 정신성이 교차하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먹의 농담이 번지며 시간의 흔적과 물질의 감각이 교차하고, 돌의 무게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백의 차분한 호흡이 남았다.

◆ 이탈리아가 사랑한 한국 조각가
196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박은선은 19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카라라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후 30년 넘게 피에트라산타에 머물며 작업해왔고, 지금은 이탈리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콘티니 갤러리의 전속 작가다.

피렌체, 로마, 피에트라산타 등 주요 도시의 광장에서 개인전을 열며 ‘이탈리아가 사랑한 한국 조각가’로 불린다.

그는 “절벽 끝에 서 있는 듯한 순간이 많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버티다 보니, 결국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작 ‘무한 기둥’은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2024–2025 한·이 상호문화교류의 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로마 곳곳에 설치되어 국가 간 문화교류의 상징이 되었다.

지난 5월, 대리석 조각의 본산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중심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Atelier Park Eun Sun’을 열었다.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했으며, 이탈리아에 한국 작가의 이름을 딴 공간이 세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2026년 10월에는 전라남도 신안 자은도에 마리오 보타와 협업한 ‘인피니또 미술관(Infinito Museum)’이 개관할 예정이다.

◆ 치유의 공간에서 빛으로
전시 제목 ‘Spazio della Guarigione’는 ‘치유의 공간’을 뜻한다. 박은선은 단단한 돌의 균열과 틈에 빛을 스며들게 하며 인간 내면의 회복과 성장, 그리고 존재의 숨결을 은유한다.

그의 조각은 멀리서 보면 묵직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가볍다. 돌이지만 움직이고, 소리까지 난다. 무게와 균형, 정적과 동적의 경계가 한 몸 안에서 반전처럼 공존한다. 박은선은 단단한 돌 속에서도 ‘움직이는 생명’을 보여준다.

야외에는 5m 높이의 ‘무한 기둥–증식(2019)’과 ‘무한 기둥–연속(2025)’ 등 대형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가나아트센터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박은선은 “내 작품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숨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조각은 이제 시간의 기록을 넘어, 나눔과 공유로 인간의 존재감을 실천하는 희망의 조각이 되었다.

전시는 2026년 1월 25일까지 열린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 출처 : https://www.newsis.com/view/NISX20251111_0003398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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