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승자는 죽었고, 돈은 살아남았다.
‘오징어게임3’은 ‘성기훈의 저항’조차 체계 안에 봉합해 버리는 자본주의의 절대 권력을 드러낸다.
선함은 남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주인공 성기훈은 태어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의 유산은 살아남은 자가 아닌, 새로 태어나 살아나갈 자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이 결말은 단순한 감동 서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설계한 욕망의 기계 안에 ‘양심’이라는 기능이 어떻게 탑재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게임의 승자는 사라졌지만, 피 묻은 456억 원은 빼돌려지지 않는다.
게임 설계자는 그 돈을 정확하고, 치밀하며, 윤리적으로 분배한다. 그 순간 자본주의의 경악스러운 봉합 능력과, 인간의 무력함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기호는 중립적…그러나 그 위의 죽음은 너무나 구체적
‘오징어게임’은 인간의 본성과 자본의 시스템을 동시에 해부한다.
야망에 휘청이는 인간들, 자유를 외치지만 결국 시스템의 명령에 복종하는 구조적 노예들, 방향을 잃고 무기력해진 군상들.
성기훈이 아무리 저항하고 외쳐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게임을 바꾸지 못한다. 다만 다음 게임에 다시 참여할 뿐이다.”
시즌3는 거대한 서사를 축소해 인간의 비참함과 죽음이라는 필연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우리는 모두 참가자이며, 누군가 추락하고, 누군가는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본은 스스로를 리브랜딩한다. 잔혹한 생존 게임은 어느새 ‘사회복지 기금’ 같은 얼굴로 탈바꿈한다.
무섭도록 합리적이고, 너무도 냉정하게 따뜻한 손길. 우리는 그런 세계를 살고 있다.
◆네모·세모·동그라미 기하학이 만든 질서의 폭력
삶은 줄넘기다. 실패하면 죽는다. ‘영희와 철수’가 무감정하게 돌리는 줄넘기. 그 안에서 인간은 건너가야만 산다.
오징어게임의 기호들(세모는 총을 든 집행자(폭력), 네모는 규칙을 전달하는 관리자(감시), 동그라미는 말 없는 실무자(노동). 단순한 형상이 아니다. 질서와 통제의 얼굴이다.
한때 바우하우스는 이 단순한 기하 도형에 보편성과 평등의 이상을 담으려 했다. 그러나 ‘오징어게임’은 그 기호들을 디스토피아적 질서의 상징으로 전도시킨다.
유토피아를 꿈꿨던 기하학은, 오늘날 디스토피아의 얼굴이 되었다.
시즌3의 마지막 무대는 붉은 원형 위에서 벌어진다.
거칠고 피를 흡수한 듯한 질감, 차가운 조명, 침묵하는 벽. 마치 현대미술관의 하이퍼리얼리즘적 설치미술처럼. 456번은 사라지고, 222번이 새겨진 아기만 남는다.
죽음은 개인을 지우고, 생명은 시스템으로 편입된다. 삶과 죽음이, 기호 위에서 순환한다.
◆피로 쓴 철학, 혹은 선의 유산
시즌3는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마무리된다. 그가 남긴 유산은 새로운 생명에게 넘어간다. 456억은 이번엔 피의 상징이 아니라 미래의 씨앗처럼 쓰인다.
시즌1이 생존의 비극을 말했다면, 시즌3는 ‘생존 이후의 윤리’를 묻는다.
“선은 끝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이 어쩌면 순진한 믿음은, 감독이 아이의 울음으로 관객에게 조용히 남겨 둔 유일한 위로다.
하지만 그 위로는 전처럼 강하게 울리지는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반복된 공식”을, 할리우드리포터는 “입체성의 실종”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시즌3는 마지막에 다시 묻는다.
이 이야기는 정말 끝났는가?
케이트 블란쳇의 깜짝 등장처럼, ‘오징어게임’은 또 다른 얼굴, 또 다른 게임으로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동그라미 위에 서 있고, 세모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네모의 감시에 무의식적으로 복종하고 있다.
게임은 끝났지만, 구조는 남았다. 그것이 ‘오징어게임’이 남긴, 영희보다 무서운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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