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기다림은 구원받기 원하는 시점에서 대부분 끝납니다. 그런데 미래를 계속 기다리느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이 보였어요. 기다리는 이들이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들 때문에 현재가 없는 사람 같더라구요.”
크리에이터 그룹 무버(Mover) 예술감독인 김설진 안무가는 19일 서울 강동구 강동아트센터 스튜디오에서 무용 ‘풍경’ 오픈리허설 및 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뒤 작품 의도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김 안무가는 “이 작품은 결국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며 “병에 걸려 죽든 나이가 들어서 죽든 모든 사람이 죽는데, 죽는 것을 너무 크게 받아들이다보니 현재를 잘 살지 못하고 놔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당장 현재있는 것들을 사람들이 만끽해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무용 ‘풍경’이 지난 2021년 12월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초연된 이후 강동문화재단과 공동 기획으로 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영화를 해체해 무대 위에서 구현한 작품으로, 요양원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희미해지는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무대예술로 담았다. 오랜 시간 기다리며 왜곡된 기억과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초현실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 안에서 인물들의 기쁨, 슬픔, 걱정 등 다양한 감정들이 무대 위에서 몸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이날 오픈 리허설에 앞서 2021년에 제작된 29분짜리 단편영화 ‘풍경’이 상영됐다. 작품은 인물들이 무용수처럼 춤으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리얼리즘을 잃지 않는다. 요양원을 찾은 딸이 환자인 아버지를 걱정하거나, 치료 결과에 절망한 가족이 의사에게 항의하는 등 현실적인 장면들이 펼쳐진다.
무용 ‘풍경’은 영화 ‘풍경’과는 또 다르다. 재공연을 위해 지난 7월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무용수들은 그들만의 색깔이 담긴 공연을 펼쳤다.
무대에는 요양원을 배경으로 환자복을 입은 4명과 간호사 1명, 환자 가족 2명 등 총 7명이 나온다. 어디선가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소리가 계속 들리지만, 단 한명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환자 가족으로 보이는 여성이 소변통을 들고 넋이 나간채 앉아 있다.
곧이어 등장한 간호사는 환자들에게 재활 운동을 가르친다며 팔·다리를 과도하게 돌리며 묘기에 가까운 동작을 보여준다.
그런 기이한 간호사를 피해 환자들은 달아난다. 이들은 발작을 하거나, 바닥에 누워서 흐느적대다가 무대를 빠져나간다.
김 안무가는 무용 ‘풍경’의 모티브를 병원에서 찾았느냐는 관객의 질문에 “이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 선배들을 생각해봤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거의 다 은퇴했거나 없어졌더라”라며 “저도 4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더 이상 필요없어지는 건가?’ ‘정말 쓸모없어진 것들은 뭐지?’ 라고 생각한게 첫 번째 시작이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면 요양원에 갈 일이 많아진다”며 “저희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요양원에 계시는 치매 환자인데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말이 안되는데 그리고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데 대화를 이어간다. 거기에 갈 때마다 그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삶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병실에 있으면 의사를 기다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방문객을 기다린다. 또 약이나 밥시간을 기다리거나 탈출 혹은 죽음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게 호기심이 생겨 이렇게 공연을 만들게 됐다”고 부연했다.
김 안무가는 관객들이 어떤 점을 느끼도록 강요받아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연이 끝나고 나서 어떤 감동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면서도 “관객들이 그런 느낌을 강요받아야 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풍경’은 ‘움직이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 사업에 선정된 무버의 두 번째 프로젝트다. 무버는 창단 이래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추구하는 동시에, 무용 공연을 찾지 않는 관객과의 공감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김설진 안무가는 “예를 들어 캠핑 가자고 했을 때 ‘겹치지 않게 갖고 가자’며 지휘하는 게 (무버에서) 제 역할”이라며 “그 사람들이 갖고 온 것을 얘기하려면 계속 연결되고 소통해야 한다. 제가 생각치 못한 것을 가져와주는 분도 있고 스스로 해주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용수를 뽑을 때 오디션을 워크숍처럼 했다. 코드가 맞는지 여부가 먼저였다. 짧은 기간에 캐치하는게 쉽지는 않지만, 기능적으로 잘하는 사람보다는 작업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며 “저와 작품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무버”라고 덧붙였다.
김설진은 벨기에 유명 현대무용단인 ‘피핑톰’에서 단원으로 활약해온 현대무용수이자 안무가다. 그는 ‘엠넷’ 댄스 경연 프로그램 ‘댄싱9’ 시즌2·3에서 우승하며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가수 이효리의 노래 ‘서울’의 안무에도 참여했다.
2017년 JTBC의 전체관람가에서 이명세 감독의 단편영화 주연으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KBS 수목드라마 흑기사에도 출연하며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tvN 드라마 ‘빈센조’의 래리 강, 연극 ‘완벽한 타인’의 페페를 통해 배우로서 입지를 굳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스위트홈’ 속 ‘연근 괴물’도 직접 연기했다.
한편 김설진이 이끄는 무버의 대표 레퍼토리 ‘풍경’은 다음 달 16~18일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한강에서 공연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dazzling@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