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공주 무령왕릉 북동쪽에 분포해 있는 이름 없는 왕릉의 주인이 발견 100년 만에 특정됐다.
일제 강점기에 도굴돼 무덤의 크기와 위치로 백제 왕족의 것으로 추정됐을 뿐, 100년 가까이 이름 없는 무덤이었던 왕릉원 2호분 주인은 15세에 요절한 ‘삼근왕(465~479)’인 것으로 국가유산청은 추정했다. 성인에 비해 마모가 덜 된 어금니 2개가 근거다.
이 무덤에서는 유리옥이 달린 금귀걸이 등 유물도 출토됐는데, 이는 당시 백제의 교역망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성과다.
황인호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장은 17일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열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조사성과’ 기자간담회에서 “2호분 어금니 주인은 10대 중후반의 청소년에 해당한다”며 “2호분 인골의 연대 판정이 어려운 상태지만 출토된 금공예품이 백제 웅진기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밝혔다.
◆유리옥 금귀걸이 등 유물 수두룩…백제-신라, 혼인동맹 통한 금공예 기술 공유
연구소가 이번에 재조사한 왕릉원 1~4호분은 무령왕릉 묘역과 구분되어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일제강점기때 모두 도굴된 상태로 한차례 이미 조사가 진행된 바 있으나, 연구소는 96년 만인 2023년 9월부터 재조사 중이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는 백제가 공주에 도읍한 475년부터 538년까지 재위한 웅진기 왕들의 묘역이 모여 있다. 21대 개로왕부터 개로왕 아들 22대 문주왕, 손자 23대 삼근왕, 아들 ‘곤지’의 아들 24대 동성왕, 동성왕 형제인 25대 무령왕까지다.
이번 조사 결과, 한성기에서 웅진기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 무덤은 내부 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바닥에 하천에서 채취한 자갈을 채운 조성방식이 확인됐다.
특히 2호분에서는 청색 유리옥이 달린 금 귀걸이, 은에 금을 도금해 줄무늬를 새긴 반지, 철에 은을 씌워 장식한 오각형 칼 손잡이 고리 장식 등 화려한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
삼국시대 금속공예 전문가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는 “1~3호분에서 출토된 금속 공예품들은 한성 시기 금 공예품과 일부 유사한 면이 있지만 차이가 있다”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는 흡사해 이 유물들은 475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서서히 안정된 상태에서 금속공예 문화가 다시 만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분석했다.
특히 이번에 출토된 청색 유리옥이 달린 금귀걸이가 가장 주목된다.
전체 길이는 6.5㎝에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귀걸이에는 중간에 청색 유리 옥이 장식되어 있다. 줄무늬 장식이 시문된 그물모양 씌우개가 유리옥을 위아래로 감싸고 있다.
연결 장식은 금고리를 아래위 왼쪽과 오른쪽을 관통시켜 겹 사슬을 만들었다. 끝에 장식은 가장자리가 둥근 금판 2매를 수직으로 접어서 붙였다. 접합된 부분에는 추가 장식을 달기 위한 고리도 달려있다.
이 금귀걸이는 백제 초창기 한성기의 귀걸이와 웅진 후반기(무령왕릉)의 왕비 귀걸이 중간 형태로 보인다.
이 교수는 “백제 무령왕 출토품을 제외한다면 가장 뛰어난 제작 의장을 보여주고 있다”며 “그동안 무령왕비 귀걸이의 조형이 무엇인지 학계에서 논란이 많았는데, 2호분에서 무령왕비 귀걸이와 유사한 사례가 출토되면서 우리가 잘 아는 국보 귀걸이가 탄생하기까지 과정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2호분에서 나온 반지는 직경 1.9㎝ 너비 1㎝로 재질은 은에 금으로 도금한 장신구다. 성인 남성의 손가락에 착용하기는 어렵고 청소년이나 여성의 경우 세번째 손가락에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황 소장은 “마디가 굳지 않은 성인이나 청소년의 약지에 들어갈 수 있다”며 “비슷한 사례가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도 있어 당시 백제와 신라 왕실에서는 이런 형태의 반지가 유행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동성왕 시기에는 신라와 혼인 정책이 적극적으로 이뤄져 왕실 간 장신구의 스타일과 제작 기법이 공유됐던 것’이라며 “혼인 동맹을 통해서 양국의 금 공예품의 제작 기술이 공유됐다”고 덧붙였다.
◆어금니 2점으로 100년 만에 밝혀진 무덤 주인
이번 재조사에서 나온 어금니 2점이 무덤주인이 삼근왕이란 추정에 힘을 보탰다.
이우영 가톨릭대 해부학 교수는 법의학적 분석 결과에 대해 “출토된 어금니 2점은 오른쪽 위턱에 있었던 치아들로 둘째 작은 어금니와 첫째 큰 어금니”라며 “치아에 교두라고 하는 도드라져 있는 부분이 얼마나 달아 있는지 즉 교모도를 보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둘째 작은 어금니 같은 경우에는 교모도가 상당히 적은 편이었고 첫째 큰 어금니 같은 경우에는 교두라든지 교두점 같은 부위에서 약간의 교모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이런 것들을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20대가 아직 되기 전 한 10대 정도의 연령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황 연구소장은 “법의학적인 분석을 통해 무덤 주인공이 10대 중후반이라는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면 2호분에 묻힌 왕은 479년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삼근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삼근왕은 제22대 문주왕의 장자로 13세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삼국유사’에는 삼걸왕(三乞王)이라고 기록돼 있다. 재위 2년에 좌평 해구(解仇)의 반란을 겪고 반란이 평정된 다음해 숨을 거뒀다. 그의 아버지인 문주왕은 웅진 천도 2년 만인 477년에 귀족 세력에게 피살되어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지 4년 만에 두 명의 왕이 운명을 달리했다.
황 소장은 “문주왕과 삼근왕이 개로왕 직계이고 죽음의 시차가 2년에 불과하다”며 “이를 고고학적 관점에서 보면 두 왕의 무덤이 인접해 있고 규모나 구조가 거의 같다. 따라서 삼근왕릉으로 추정되는 2호분과 인접해 있고 규모와 구조가 거의 비슷한 1호분이 삼근왕의 아버지인 문주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또 “3호와 4호분은 2호분에 비해 돌방 규모가 조금 작고 구조도 약간 차이가 있다”며 “2호분이 서쪽에 열을 지어 배치되어 있어서 삼근왕과 관련이 있는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순발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는 “98년 만에 다시 조사를 해 본 결과 놀라운 성과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군가를 추정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라며 “문주왕의 직계 가족들의 무덤을 찾았다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호분 어금니가 나왔는데 법의학적 그 분석에 따르면 적어도 미성년의 남성이고 미성년 남성이면 떠오르는 왕이 삼근왕”이라며 “문주왕과 부자 관계라 아마도 같은 묘역에 있었을 것이고 동쪽에 최초로 묻은 것이 문주왕이고 그 서쪽에 있는 2호분이 바로 삼근왕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런 추정을 더욱더 가능하게 해 주는 정황으로서는 거기에서 나온 검은 세공품이 놀라울 정도로 중요한 왕실 수공을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이 확인됐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소는 2호분 주인을 삼근왕으로 확정하려면 추가 분석이 필요하다. 오동선 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일단 법의학적 조사로 연령 이외에는 확인하기는 좀 어려운 상황이고 DNA, 방사선 탄소연대 같은 절대 연대 분석을 하려면 파괴 분석을 통해서 추가 분석을 해야 한다”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파괴 분석’을 진행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색·녹색 유리 구슬은 ‘태국산’…교역·외교 입증
연구소는 이번 재조사 결과, 백제가 웅진 초기부터 이미 굳건한 정치체계와 활발한 대외 교역을 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물들과 왕실의 돌방무덤 구조과 묘역 조성 과정도 확인했다.
2호분과 3호분에서 출토된 여러 종류의 유리 옥 1000여 점 중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산지가 태국으로 분석됐다.
김규호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출토된 유리의 가장 큰 특징은 동남아지역 유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라며 “일부 황색과 녹색 유리의 경우 태국 광산에 나온 원료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됐다”고 분석했다.
황 소장은 “백제가 동남아시아 지역과 직접 교역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유리옥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서 위기에 처한 백제가 선택한 타계책이 광범위한 외교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령왕이 중국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제도를 정비해 재계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한성기에 이어 웅진기 전반에도 대외 교역 체계를 잘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올해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 1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라며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던 나라였으나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해 실체에 접근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재조사는 그 자체 만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한 시도”라며 “특히 일제강점기 도굴된 상태로 조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웅진기 전반 백제 왕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인물이 대거 확인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과”라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선 1971년도에 무령왕릉 발굴 현장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에서 발췌한 음성도 처음 공개됐다. 이 녹음 기록은 공주시에 사는 이재훈 씨가 이사한 집에서 발견해 보관했던 자료로, 국가유산청은 지난 1월 기증받았다. 녹취자는 1971년 당시 MBC 지방주재통신원 서두선 씨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은 해당 녹음물을 정부대전청사 별관동인 국가유산청 기록관 담아이음에서 보관하고 있다. 자료 중 일부는 담아이음에 방문하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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