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박미선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제시한 28개 평화안에는 데드라인과 암묵적 위협이 포함돼 있으며, 이는 단순한 정치적 압박을 넘어 “수용하지 않으면 미국과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 단절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23일(현지 시간) CNN이 보도했다. 사실상 트럼프 행정부의 ‘최후통첩’에 가깝다는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은 21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해 “우리의 제안을 좋아해야 할 것”이라며 협상 의지가 없음을 시사했다. 이어 27일까지 평화안을 수용하라고 못 박으며 구체적인 데드라인도 제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존엄을 잃을 것인지, 핵심 파트너를 잃을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의 문제”라며 “28개 조항의 어려운 조건 또는 혹독한 겨울 중 택일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평화안에는 러시아가 현재 점령지보다 더 넓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유지하도록 허용하고, 우크라이나 군대 규모를 제한하며,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을 금지하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양측 의견을 일부 반영했다고 주장하지만, 다수 조항이 러시아 요구를 대폭 수용한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CNN은 우크라이나가 평화안을 거부해 미국의 지원이 끊길 경우, 기존의 병력난·재정난에 더해 무기 공급과 정보 접근까지 차단되면서 전쟁 수행 능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기 지원 중단은 2022~2023년만큼 즉각적으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영향이 크다. 특히 패트리엇을 비롯한 방공 시스템은 미국산 부품과 미사일 의존도가 절대적이며, 미국 정보가 끊길 경우 모든 방공 시스템이 ‘불완전한 데이터’에 의존하게 된다. 미국 정보는 러시아 미사일 조기경보뿐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깊숙한 군사·에너지 시설을 타격할 때도 활용돼 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 재정으로 운영되는 약 900억 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우선 요구 목록(PURL)’을 통해 미국산 무기 판매를 허용해왔는데, 평화안 거부 시 우크라이나가 이 프로그램에서 제외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병력 부족이다. 올해 1~7월 탈영 병사만 수만 명에 달하고, 보병부대 상당수는 인력난을 겪고 있다.
재정 부담도 심각하다. IMF는 우크라이나가 향후 1년간 650억 달러의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EU(유럽연합)는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대출 담보 형태로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지만, 평화안에는 ‘동결된 러시아 자산 1000억 달러를 미국 주도의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투입하고, 이익의 5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유럽 보유 러시아 자금의 해제까지 명시돼 있어 EU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평화안 5항은 “우크라이나는 신뢰할 수 있는 안보 보장을 받는다”고 규정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없다. “러시아가 주변국을 침공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3항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부 매체는 부속 문서에 “러시아의 지속적 무력 공격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고 전했지만, CNN은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유럽 주요국과 일본·캐나다는 공동성명에서 이 계획이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밝혀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군사력 제한은 러시아의 추가 침공을 초래할 수 있다며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리투아니아의 가브리엘리우스 란즈베르기스 전 외무장관은 “우크라이나의 안보는 곧 유럽의 안보이며, 이제 유럽이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CNN은 “이번 평화안은 러시아–NATO 간 대화를 미국이 ‘중재’하는 형태로 설계돼 있다”며 “이는 미국이 전통적 동맹국의 위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 ‘중재자’를 자임하려 한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애나 애플바움 ‘애틀랜틱’ 칼럼니스트는 이 계획을 두고 “소국을 희생시키는 강대국 거래의 전통을 부활시킨 것”이라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 얄타 합의에 이은 또 하나의 오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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