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무대에 서면 아직도 떨리냐고 사람들이 묻는데, 떨려요. 정말이에요. 단순히 무대가 무섭다거나 긴장이 된다는 것일 수 있지만, 우리가 살아온 무게만큼 ‘짐이 더 무겁다’, ‘책임이 무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로 배우 박정자(83)는 15일 서울 종로구 서울연극센터에서 열린 ‘제10회 늘푸른연극제’ 제작발표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원로 배우로서 작품을 대할 때 젊을 때와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는지 묻자 이같이 답했다.
박정자는 “젊었을 때에는 그 젊음만으로도 무대에 설수 있었지만, 지금은 적어도 내 이름 석자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하는 시기”라면서 “육체적으로 우리가 연극의 에너지를 많이 갖고 싶지만 그 에너지를 충분히 가질 수가 없다. 우선 연령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만은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오히려 그 마음이 더 깊어질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늘푸른연극제는 오는 30일 개막을 앞두고 있다. 박정자를 비롯해 배우 이종국과 최종원이 각각 주연을 맡은 작품들이 무대에 오른다. 연출가 기국서도 작품 한 편을 선보인다.
늘푸른연극제는 70세 이상 원로 연극인들의 예술 세계를 다양한 공연 형식으로 기록하고 복원하는 축제다. 단순한 회고나 의례적인 존경의 의미를 넘어, 평생을 예술에 바친 연극인들의 삶과 작품을 동시대 관객과 미래세대에 생생히 전달하는데 목적을 둔다.
특히 축제는 연극 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토대이자, 후배 예술인들에게는 ‘예술의 길’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상기시키는 동기 부여의 무대가 되고 있다.
박정자는 다음 달 7~10일 고연옥 작(作)·한태숙 연출의 ‘꿈속에선 다정하였네’로 공연한다. 연극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남긴 회고록 ‘한중록’을 재구성해 그녀의 기억을 따라 홍씨의 삶을 되짚는 내용이다.
박정자는 “2019년 공연에 출연했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의 형식은 낭독극이었다. 그 작품에 출연하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배우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에 더 집중했다”며 “당시 작품을 함께 만들었던 한태숙 연출과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극단 76의 창립자이자 대표 연출가인 기국서(72)는 “관객들이 작품을 즐겨야 하는 수준이어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를 못 만들어서 그렇다”며 “예술을 사람들이 이렇게 즐기게끔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음 달 14~17일 사뮈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을 무대에 올린다. 동생인 배우 기주봉이 주연으로 나온다.
1984년 대전에서 극단 앙상블을 창단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원로 배우 이종국(75)은 이근삼 작·심재찬 연출의 ‘막차 탄 동기 동창’을 공연한다. 연극 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최종원(75)은 이강백 작·김철리 연출의 ‘북어대가리’로 무대에 선다. 두 명의 창고지기가 기계적인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다룬 작품이다.
이종국은 “초등학교 동창생이 62년 만에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라면서 “두 명의 성격이 다르고 티격태격 둘이 싸우지만, 재미있고 위트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 대한 쓴소리도 나왔다.
최종원은 “한 작품을 했다가 추억이 아니라 빚더미에 넘어가면 그건 누가 책임지나. 이런 대우는 국가적 차원에서도 말이 안 된다”라면서 “저는 80세가 넘으면 늘푸른연극제에 출연해볼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후배들이 권유해서 신청했다. 하지만 하면서도 걱정이다. 이 제작비를 가지고 누가 엄두를 내나”라고 지적했다.
이어 “문체부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예산이 깎이고 깎여서 이런 식으로 지원한다는 건 의미도 퇴색하는 것”이라며 “이런 계획이 있으니 어쩔수 없이 한번 해야지 하지만, (문제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손정우 한국연극협회 이사장도 “예전엔 작품당 1억 정도 지원됐는데, 지금은 절반 수준”이라며 “연극, 무용, 음악 등 순수 공연예술에는 1조가 넘는 문체부 예산 중 10분의 1 정도 밖에 안들어 간다. 정부가 말보다는 예산을 통해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가 주최·주관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창작센터가 후원하는 ‘늘푸른연극제’는 30일부터 다음 달 17일까지 서울연극창작센터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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