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뉴시스]이재훈 기자 = 콘서트는 가수, 스태프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팬들의 집적된 기억도 그 도면의 중요 재료죠. 추억을 강력하게 소환하는 대표곡, 교감에 성공한 신곡의 조화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특히 팬들은 지난한 삶 속에서 좋은 기억을 뒤적이고자 힘들게, 콘서트 표를 예매한 뒤 불편을 감수하고 현장으로 나섭니다.
29일 오후 경기 고양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지드래곤 2025 월드 투어 [위버멘쉬] 인 코리아, 프레젠티드 바이 쿠팡 플레이'(G-DRAGON 2025 WORLD TOUR [Übermensch] IN KOREA, presented by Coupang Play)는 그래서 빅뱅 팬덤 ‘V.I.P’뿐 아니라 업계에서도 큰 관심이었습니다.
빅뱅 리더 겸 솔로가수로 K팝 솔로 최고 스타인 지드래곤(권지용)이 무려 8년 만에 여는 콘서트였기 때문이죠.
정규로는 11년 만인 최근 발매한 정규 3집 ‘위버멘쉬(Übermensch)’ 신곡 무대를 오프라인에서 첫 공개하는 자리이자, 그간 솔로 활동을 대표하는 히트곡을 망라한 세트리스트도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지드래곤도 “컴백하는 데, 돌아오는데 돌고 돌아서 오래 걸렸어요. 코가 찡긋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이라이트 대목이 몇 군데 있었어요. 대표적인 무대는 ‘크레용’이었죠. 곡 초반에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를 샘플링한 이 곡은 관객의 떼창을 불러 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날 ‘환상속의 그대’ 외에도 귀에 익숙한 곡들이 일부 샘플링돼 흥겨움을 더했습니다. ‘니가 뭔데’는 미국 그룹 ‘잭슨 파이브’의 ‘아이 원트 유 백’, ‘개소리’에선 미국 힙합스타 켄드릭 라마 ‘낫 라이크 어스’, ‘투 배드’에선 프랑스 거장 일렉트로닉 듀오 ‘다프트 펑크’의 ‘겟 러키’ 일부가 각각 곡의 전환 구간에서 사용됐습니다.
YG엔터테인먼트가 발굴한 그룹들인 빅뱅과 ‘2NE1’의 각 팀 리더들로 ‘YG 리더즈’로 통하는 지드래곤과 씨엘의 협업곡인 ‘더 리더스’에선 실제 씨엘이 게스트로 나와 공연장이 들썩였습니다. ‘2025년 판 더 리더스’의 탄생이었습니다. 씨엘은 ‘R.O.D’도 같이 불렀습니다!
패셔니스타답게 지드래곤 의상도 단연 눈길을 끌었습니다. 빨간 장미꽃으로 뒤덮인 재킷과 날개가 달린 재킷은 그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아이템이었죠.
화룡점정은 ‘삐딱하게’와 ‘하트브레이커’로 이어지는 구간이었습니다. 빅히트곡인 ‘삐딱하게’의 강력한 아우라에선 상당수 관객들이 일어섰죠.
이후 그리스신화를 비롯 새 앨범 뜻인 ‘초인’을 상징 혹은 은유하는 장면들이 가득 담긴 영상을 상영한 후 선보인 ‘하트브레이커’ 무대가 이날 공연의 백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지드래곤이 2009년 발매한 솔로 정규 1집 ‘하트브레이커’ 타이틀곡이죠.
하늘에선 드론쇼로 16년 전 ‘하트브레이커’ 때 얼굴과 현재의 ‘위버멘쉬’ 얼굴을 오갔고, 무대 위에선 ‘하트브레이커’ 동상과 ‘위버멘쉬’의 동상이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었습니다. 강력한 라이브 밴드의 연주와 함께 비트박서 윙(WING)이 빚어내는 화려한 비트 위에 내달리는 지드래곤은 시간을 초월한 듯했습니다.
여기서 자랑 아닌 자랑을 하자면 지금까지 운 좋게 저는 한국에서 열린 지드래곤의 솔로 콘서트를 모두 객석에서 지켜봤습니다. 리뷰 기사도 꼬박꼬박 써서 이 기사에 관련 기사로 붙여 놓았습니다.
2009년 12월 5~6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첫 번째 콘서트 ‘샤인 어 라이트(Shine A Light)’는 감각적인 이미지가 앞섰던 무대였습니다.
2013년 3월 30~31일 역시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던 ‘2013 지드래곤 월드투어-원 오브 어 카인드(ONE OF A KIND)’에선 이미지 사용이 더 노련해졌습니다. 음악을 중심에 놓고 영상과 퍼포먼스를 결합해 음악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8년 전인 2017년 6월10일 서울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연 세 번째 솔로 콘서트 ‘2017 콘서트 – 액트(ACT) III, 모태(M.O.T.T.E)’는 지드래곤의 감각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솔로가수로서 자신의 성장서사를 노래로 써내려가듯, 당일 부른 20여곡의 곡 순서 대부분을 자신이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순으로 정했습니다. 첫 곡이 첫 솔로 앨범 타이틀곡 ‘하트브레이커’였습니다.
그러니, 이번 콘서트는 ‘모태’의 연장선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3집 ‘위버멘쉬’의 선공개곡 ‘파워’로 시작한 이날 공연은 지드래곤이 지드래곤을 뛰어넘는 현상학의 물리적 실현을 시도한 자리였거든요. ‘위버멘쉬’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삶의 목표로 제시한 인간상인 ‘초인’을 뜻하는 위버멘쉬를 콘셉트로 삼았습니다. 앨범명은 영어로 ‘비욘드-맨(Beyond-Man)’, 즉 ‘넘어서는 사람’을 의미하죠.
프로듀싱 능력까지 겸비한 지드래곤은 ‘음악적 진보’를 대변한 아이돌입니다. CD가 음반이 아닌 USB로 발매됐던 미니 2집 ‘권지용’은 국내 음악 산업계 전반에 음악 저장 매체에 관한 화두를 꺼내며 ‘USB가 물리적인 음반이냐, 아니냐’는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했죠.
‘파워’를 시작으로 ‘홈 스위트 홈’ ‘투 배드’까지 연달아 음원 차트 정상에 오른 곡들이 대거 실린 이번 음반은 음악적 논쟁보다, 안정을 기반으로 한 확장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다수의 노래가 영어로 돼 있고 한국계 미국 싱어송라이터 앤더슨 팩 등 외국 유명 음악가들의 협업이 도드라지기 때문이죠. 지드래곤의 직관적인 비트·멜로디 만드는 능력은 여전한데 거기에 검증된 뮤지션들의 팝, 발라드, 디스코 감성을 섞어놓았습니다.
이번 활동은 그래서 단순히 음악 위에 눕혀 놓는 게 아니라, 여러 문화적인 맥락으로 배열해서 봐야 합니다.
그간 군 복무, 루머 등으로 인해 대중과 접점이 적었던 만큼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인’은 지드래곤의 음악적 행보뿐 아니라 기존 삶 자체를 넘어서려는 수식으로 읽힙니다. 기존과 달리 부쩍 많아진 대중 대상 활동은 앨범 제목 ‘초인’을 그가 의도한 방향이 아닌 오독할 수 있게 합니다. 그가 사실 완벽한 초인(超人)을 선언한 게 아니라, 손을 내밀어 사람을 부르는 초인(招人)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한 거죠.
콘서트는 그렇게 초인(招人)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자리입니다. 이번에 지드래곤의 골수팬뿐 아니라 지드래곤이라는 아이콘의 콘서트에 가고 싶은 일반 대중, 외국 팬들이 대거 현장을 찾은 이유입니다. (이로 인해 떼창의 힘이 떨어지는 등 객석의 응집력이 부족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그건 다음에 다뤄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3월의 눈(雪)’ 얘기를 하지 않고는 이번 네 번째 콘서트 리뷰로 나아갈 수 없네요. 공연 첫날 오전엔 수도권엔 예고 없던 눈발이 흩날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황했지만 같은 시각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콘서트를 준비하던 지드래곤과 스태프만큼, 혼란스러웠던 이들은 없었을 겁니다. 거기에 돌풍까지 더해졌죠. 결국 기상악화로 인해 시설물 보강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이로 인해 오후 6시30분 시작 예정이었던 공연은 30분 지연돼 시작 시간이 오후 7시로 변경됐습니다. 여기에 43분이 더 지연됐고, 안 그래도 낮부터 영하의 날씨에 추위에 떨어야 했던 3만 관객(양일간 6만명)은 총 73분간 하릴 없이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역시 오전에 눈발이 흩날린 30일 공연도 30분 지연돼 오후 7시에 시작했습니다.
추위가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난관이었습니다. 팬들은 온전히 공연에 집중하기 위한 컨디션이 아니고, 지드래곤 역시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공연을 해야 했습니다. 일부 팬들이 그의 좋지 않은 목상태를 지적하기도 했는데, 체감 온도가 영하인 날씨에 얇은 무대 의상을 입은 탓도 컸을 겁니다.
3월의 눈은 실재와 환상을 오갑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분명 부드러운 얼음덩어리입니다. 3월은 그러나 자명하게 봄을 뜻하죠. 눈이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죠. 눈은 또 금방 사라집니다. ‘3월의 눈’은 결국 환상과 사라짐의 은유입니다.
지드래곤의 이번 콘서트 역시 ‘3월의 눈’을 닮았습니다. 쉽게 날씨가 예상되지 않는 3월 말 야외 공연장을 새 월드투어 포문지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많습니다.
아울러 기억 속에서 분명 존재하는 추억, 바로 앞에서 사라질 거 같은 그리움은 예상치 못한 날씨에 온전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찰나의 인생 같은 봄날의 눈이 미래에 어떻게 기억될 지는 지금의 우리는 모릅니다. 오랜만에 팬들 앞에서 공연하면서 추위와 지연에 거듭 사과하던 지드래곤의 사투는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 자리할 겁니다.
그래서 이번 지드래곤의 콘서트는 믿음과 해석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세상의 영역이 기대대로 되면 좋겠지만, 결국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내년 데뷔 20주년을 맞는 빅뱅과 지드래곤은 각종 우여곡절 끝에도 우리에게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드래곤은 공연 말미 스무살이 되면 성인식을 해야 된다면서 빅뱅 20주년 투어도 예고했습니다. 스케줄상 29일 공연엔 게스트로 나서지 못했던 태양, 대성은 30일 공연엔 같이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로 만들지 않고서는 전진할 수 없습니다. ‘하트브레이커’의 지드래곤을 재서술해야 ‘위버멘쉬’의 지드래곤을 서사화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만 지드래곤이라도 해도 삶의 서사는 전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쓸 수 없어요. 게다가 쌍방이 같이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더 쓰기 어려운 건 예측할 수 없는 작용, 반작용에 3월의 눈 같은 외부 요인이 있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그리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그 그리움은 마냥 기다림이 아닌 또 다른 기대를 낳아야 합니다. 당장은 기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도로 인한 더 좋은 재회의 기회가 돼야죠. 이런 평서문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마침 지드래곤이 콘서트에서 했네요. 그가 예고한 앙코르 공연에선 그 답이 더 분명할 겁니다.
“몇 년 전 이맘 때 빅뱅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발표했어요. 다양한 계획도 세웠는데, 여러 가지 (멤버들의) 각자의 상황으로 못하게 됐는데, 각자 어딘가에서 열심히 빛나고 있죠. 그렇지만 오늘은 이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제가 제일 빛이 날 것 같거든요. 이전까지는 쉬는 시간이라는 게 없이 활동을 계속하다 보니까 컴백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처음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처음으로 느끼고 진짜로 뭘 하고 싶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정말 많이 겁났지만 가장 그리웠기도 하고 만나기로 약속도 했잖아요. 올라오는 데까지 조금 돌고 돌아서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는데 그래도 뭐 오늘 자리가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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