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번 전시는 배압법(背押法)을 이용하는 기존 ‘접합’의 방식과 형태를 고수하되 그 기법과 의미의 변주를 조명하는 신작을 선보인다. 색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이 반영된 다채색의 ‘접합’ 신작에서는 캔버스 뒷면에서 만들어진 작가의 붓 터치(mark-making)와 함께 밝은 색이 섞인 그라데이션이 강조됐다.”
‘배압법 창시자’이자 단색화 거장 하종현(88)화백 개인전이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20일 개막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이후 접합(Post-Conjunction)’ 연작 등 확장된 ‘접합’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K1과 한옥에서 펼친 전시는 국제갤러리에서 3년 만에 열린 전시다.
하종현 작업세계 핵심은 ‘배압법’이다. 올이 굵은 마포 뒷면에 두터운 물감을 바르고 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 넣는 기법으로 회화의 혁신을 이룬 작업이다.
기존의 ‘접합(Conjunction)’연작과 여기서 비롯된 다채색의 ‘접합’, 제스처의 자유분방함과 기법의 자연미를 강조하는 최근의 ‘접합’을 살펴볼 수 있다.
◆국제갤러리, ‘접합’ 변주 신작 조명
이번 전시에 선보인 다채색 ‘접합’ 신작은 밝은 색이 돋보인다.
기존 ‘접합’ 연작이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색상이 주로 사용되었다면, 다채색의 ‘접합’ 신작은 주변과 일상의 색상을 도입해 보다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졌다.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접합’ 신작 ‘Conjunction 24-52′(2024)는 마포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이 앞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접합’ 초기작을 연상시킨다. 반면 그라데이션을 이용해 흰색이 보다 세련되어 보이고 점성 있는 물감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부각해 물감이 지닌 물성을 더욱 강조했다.
기존의 ‘접합’ 연작에서 기둥 형상의 수직적인 제스처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자유분방하지만 사전에 계산된 듯한 미묘한 사선 형태의 붓 터치들이 캔버스 화면을 가득 메웠다.
‘재료의 물질적 특성이 만들어내는 표현이 곧 회화의 본질’임을 골조로,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시대에 상응하는 형식적 변모를 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만선(滿船)의 기쁨”으로 희열에 찬 원색의 화면은 ‘이후 접합’ 연작으로 이어진다. 나무 합판을 일정 크기의 얇은 직선 형태로 자른 후 그 개별의 나무 조각을 일일이 먹이나 물감을 칠한 한지, 광목 천, 마대 천, 캔버스 천 등으로 감쌌다.
작가는 이 나무 조각들을 화면에 순차적으로 나열했다. 틀에 하나의 나무 조각을 배치하고 가장자리에 유화 물감을 짠 다음 또 다른 나무 조각을 붙여 물감이 나무 조각 사이로 눌리며 스며 나오도록 하는 방식을 반복했다.
이렇게 스며 나온 물감 위에 스크래치를 하거나 유화 물감으로 덧칠하는 등 화면에 리듬감과 율동감을 더함으로써 형태와 뉘앙스가 다채롭게 변모한다.
하 화백의 표현대로 ‘만선의 기쁨’은 평면과 조각적 요소의 만남, 시대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재료로의 확장 등 ‘접합’의 범주를 확장해 나가는 작가로서의 성취감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박서보, 이우환, 권영우 등 동시대 작가들과 함께 단색화의 거장으로 불린 그가 최근 ‘이후 접합’이나 다채색의 ‘접합’을 통해 단색화라는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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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현이 다룬 물질과 회화적 기법이 재료와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려는 작가적 태도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과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라는 당시 한국의 시대적 맥락과 상호작용하며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전통과 동시대성, 서구의 기법과 동양의 정신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잠식되기보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재료의 물성을 부단히 탐구하며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천착해 온 하종현에게, 회화 작업은 그의 인생 전체여정을 아우르는 집약체일 따름이다.(국제갤러리 윤혜정 디렉터)
┼이번 전시는 현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와 궤를 잇는다. 하종현이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1959년부터 ‘접합’연작을 시작한 1975년까지의 초기 작업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아트선재센터의 ‘하종현 5975’를 보고 국제갤러리로 관람이 이어진다면 ‘단색화 거장’으로 우뚝 선 하종현의 작업세계를 쉽게 파악해볼 수 있다. 전시는 5월 11일까지.
◆단색화 거장 하종현 화백은?
1935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으로 1959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1990~1994)과 서울시립미술관 관장(2001~2006)을 역임했다. 현재 경기도 일산에서 거주하고 작업하고 있다.
그동안 뉴욕, LA, 런던, 파리 등 세계 주요 도시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LA 해머 미술관(2024),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2023), 덴버 미술관(2023), 뉴욕 현대미술관(2019), 상하이 파워롱 미술관(2018), 브루클린 미술관(2017), 벨기에 보고시안 재단(2016), 시카고 미술관(2016), 프라하 비엔날레(2009) 등에서 단체전에 참여했다.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도쿄도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홍콩 M+,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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