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고홍주 기자 = 본사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를 동의 없이 다른 근무장소와 내용으로 전직 발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이 나왔다.
중노위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25년 2월호 노동위원회 소식지’를 발간했다고 6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023년 8월 의약품 제조·판매업체인 B사 본사 글로벌RA팀에 입사했다. 의약품 승인·허가와 관련해 기획·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이듬해인 2024년 4월 인천의약팀으로 돌연 전직돼 병·의원 영업 업무를 맡게 됐다.
이에 A씨는 “영업직을 수행하면서 임금이 삭감되고 출퇴근 이동시간과 환승, 신규 담당업무 숙지, 대중교통을 이용한 제약 영업업무 어려움 등을 고려할 때 생활상 불이익이 상당하다”며 노동위에 부당전직 구제신청을 냈다.
사측은 “A씨가 글로벌RA와 관련해 11년 경력이 있다고 해 채용했으나 업무수행 능력이 현저하게 저조해, A씨가 보유한 자격 등을 고려해 상당기간 공석인 의약팀으로 인사발령했다”며 “전직 전·후의 임금 및 복리후생이 동일하고 기존에도 대중교통으로 제약 영업 업무를 하는 직원이 있는 등 생활상 불이익이 현저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전직 전 협의와 관련해서도 사측은 “두 차례에 걸쳐 성실하게 협의했다”고 했다.
초심인 지방노동위원회는 ‘각하’ 판정을 내렸다. 각하는 구제신청이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하거나 부적합할 때 본안 판단 없이 사건을 종결하는 것을 뜻한다.
당초 A씨가 지노위에 처음으로 제기한 사건은 부당해고 구제신청이었는데, A씨가 전직 후 보름 뒤인 2024년 5월 14일 징계해고됐기 때문이다. 이후 원직으로 복직하는 것이 우려된다며 부당전직을 구제신청 취지에 추가했다. 지노위는 부당전직에 대한 구제신청을 그대로 각하처리했다.
하지만 재심인 중노위는 “부당해고가 인용될 경우 원직에 대한 다툼이 예상되므로 A씨의 주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각하 판정을 뒤집고 A씨에 대한 구제를 명령했다.
우선 중노위는 “A씨가 11년 간 국내영업 업무 경험이 전혀 없고 사측에 영업직으로 인사발령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표현을 했음에도 인사발령한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근로계약서에 업무내용이 변경될 수 있음이 명시돼 있더라도 채용 목적과 근로계약상 주 업무인 글로벌RA업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업직으로 업무 변경까지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라 볼 만한 사정이 없다”며 “전직의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A씨에 대한 소속 팀장이나 동료 평가, 업무 개선 요구 등에 비춰보면 업무수행이 미진해보이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된다”면서도 “근로계약 내용에 비춰 해당 직무와 유사하거나 직무역량 요구도가 낮은 정도의 업무를 부여하는 등 조치가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보임에도 막연히 본사에는 기획·행정 업무의 공석이 없다는 이유로 영업직으로 배치했다”고 지적했다.
생활상의 불이익과 관련해서도 “주1회는 서울 본사로 출근하고 나머지 근무일은 자택인 경기도에서 곧바로 인천 영업 담당지역으로 출·퇴근하고 있는 점, 전직으로 인해 수년 간 업무경력이 단절된 점, 국내영업 업무를 새로이 익혀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사정 등을 고려하면 정신적·육체적 불이익이 상당하다”고 했다.
중노위는 전직 등 인사발령 시 근로기준법 제23조를 준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노위는 “사용자에게는 기업 운영을 위해 업무상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전직 등 인사명령에 상당한 재량권이 인정되지만, 이 경우에도 전직의 정당성을 갖출 것이 요구된다”며 “업무상 필요성과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을 비교·교량하고, 근로자와 성실한 협의 등 절차를 거쳤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김태기 중노위 위원장은 “인사명령으로 인한 다툼 등 직장 내 갈등을 예방하는 데는 근로계약서가 매우 중요하다”며 “중노위가 발간한 ‘노동법 상식 70선’을 직장 내 갈등 예방에 많이 활용해달라”고 말했다.
한편 노동위 소식지 2월호에는 이 사건 외에도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교섭창구 단일화 공고에 대한 적절성 판정 ▲노조 쟁의행위 참여에 대한 불이익 제재의 부당노동행위 여부 판정 ▲기간제 시각장애인 안마사에 대한 성과급 미지급이 차별인지 여부에 대한 판정 ▲회사 지침과 달리 근로자를 평가하고 정규직 전환을 거절한 것이 부당한지 여부에 대한 판정 등 판정례가 실렸다.
자세한 내용은 중노위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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