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1960~70년대 프랑스 회화 해체 운동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를 이끈 작가 13인의 작품이 국내 최초로 전원 참여한 전시가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에서 막을 올렸다.
회화의 틀을 해체하고, 물성과 행위로 회화를 다시 사유했던 이들의 급진적 실험은 단순한 미술사 복원을 넘어선다. 지금 한국 사회의 수도권 중심 구조, 그리고 지방 사립대학이 마주한 현실과 교차하면서 ‘예술’과 ‘교육’ 두 축의 혁명을 함께 껴안는다.
인당뮤지엄이 15일부터 선보이는 ‘쉬포르/쉬르파스’전은 회화의 구조와 의미를 근본부터 해체하고 재정의한 이들의 철학을, 한국 사회와 예술 교육의 현장으로 소환한다.
◆쉬포르/쉬르파스, 지방 대학이 껴안은 시대의 질문
“프랑스 현대미술사에서 쉬포르 쉬르파스 운동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14일 대구 인당뮤지엄에서 만난 김정 관장은 “쉬포르/쉬르파스의 13인 작가 전원의 작품을 직접 눈으로 마주한 것은 인당뮤지엄에서 이 전시를 본격 추진하고 나서야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1970년대 프랑스의 사회·정치적 배경과 오늘날 수도권 편중 구조 속 지방 사립대학의 현실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며, “쉬포르/쉬르파스가 제도와 권력 중심부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오늘날 지방 대학의 예술교육도 비슷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대학이라는 교육의 장에서 예술과 사회를 함께 질문하는 자리가 바로 이 전시라는 설명이다.
또한 “같은 시기 1970년대 대구에서도 회화의 경직성을 탈피하려는 다양한 실험들이 있었다”며, “지구 반대편에서 유사한 방식의 미술적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문화의 필연성이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이 전시를 여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쉬포르 쉬르파스…회화를 부수고 다시 세우다
1960년대 말 프랑스는 알제리 전쟁과 68혁명으로 요동치던 시기였다. 쉬포르/쉬르파스는 회화의 전통적인 틀을 해체하고, 재료와 행위, 물성으로 회화를 다시 사유하고자 했던 운동이다.
‘지지체Supports와 표면Surfaces’을 뜻하는 이 명칭처럼, 이들은 캔버스를 스트레처에서 해방시키고 염색, 접기, 매듭 등 수공예 기법을 통해 회화의 형식을 변형시켰다. 벽에 고정되지 않고 바닥에 놓이거나 구겨지고 접히며, 회화는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는 창이 아닌 존재 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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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소르본 대학 점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운동과 노동 파업, 알제리 독립 전쟁, 탈식민지화, 자본주의의 압력, 제도권 교육과 문화에 대한 청년 세대의 회의감. 이 모든 흐름이 이들의 작업과 철학 안에 녹아 있었다. 이들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미국의 색면 추상, 마르크스주의, 프로이트, 마오쩌둥 어록, 민속 수공예 전통 등 서구 예술사와 사상 전반을 넘나들며 비평적 예술 언어를 새롭게 구축했다. 이를 구체화한 작업들은 미니멀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회화가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고 어떻게 질문할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흐른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건너온 작품들은 전통적인 화면에서 탈주한다. 틀 없는 캔버스가 바닥에 펼쳐졌고, 말리거나 염색되어 벽에 걸렸다. 도장, 실, 철조망, 폐유, 유리창 조각, 신문지, 편지 봉투까지 일상적 오브제가 재료로 동원됐다. 작가들은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 그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의도를 넘어선 흔적들- ‘그 자체가 회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1970년대 실험미술과의 대화
이번 전시는 단지 프랑스 회화사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김정 관장은 “전체 전시 구조가 ‘지지체와 표면’을 해체하고 그 결과물을 회화로 다시 사유하려는 시리즈”라며, “한국 1970년대 대구에서의 실험미술 역시 비슷한 사유와 비평의 맥락에서 닿아 있다”고 봤다.
한국 역시 당시 정치적 억압과 검열 속에서 제도 밖의 미술가들이 언어, 공간, 매체를 해체하며 시대에 저항했다. 이강소, 김구림, 정강자, 이우환 등으로 대표되는 실험세대는 ‘회화 아닌 회화’, ‘미술 아닌 미술’로 기존 미술 언어에 질문을 던졌다. 쉬포르/쉬르파스의 해체적 감각과 물성 중심의 실험은 이들과도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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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포르 쉬르파스의 회화는 다채롭고 화려한 색채를 띠기도 하지만, 그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배치되고, 접히며, 구성된다. 작가들은 오히려 의미의 과잉을 경계하고, 재료 자체가 의미가 되도록 구성했다. 회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게 만드는 실험. 그것이 이 운동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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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패배했다”는 선언 이후, 다시 회화를 묻는다
“회화의 해체를 통해 회화를 보여주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번 전시에 내한한 작가 노엘 돌라(Noël Dolla)는 당시 그룹의 막내였다. 80세가 된 그는 50년 만에 이국땅에서 쉬포르 쉬르파스의 정신과 시대성을 증언했다.
그는 한국 기자들을 만나 “예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면 지금의 세계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라며, “예술은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말했다. 이상을 품었던 예술이 현실 앞에서 무력해졌음을 인정한 고백이었다.
“예술은 의식과 믿음을 전달하는 창구가 되어야 하며,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한 시각과 신념을 바꿀 수 있을 때 비로소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회의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예술의 희망이자 차세대 지성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침대 시트, 걸레, 손수건 등 여성성을 드러내는 재료를 작업에 사용해왔다. “단지 ‘소재’가 아니라, 여성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재료를 통해 기호 없이도 상징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틀을 넘어선 회화를 주장했다. “우리는 단순히 틀(스트레처)에서 해방된 회화를 한 게 아닙니다. 벽, 공간, 재료, 그 모든 요소들과의 상호작용까지 포함해 회화라는 개념을 해체했습니다.”
인당뮤지엄 김정 관장은 “그간 한국에서는 쉬포르 쉬르파스 운동을 대표하는 일부 작가의 개인전이나 작품 소장 전시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바 있지만 운동을 주도한 프랑스 13인의 작가 전원이 참여하는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는 것은 이번이 최초”라며 “이번 전시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예술이 시대와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 13일까지. 관람은 무료.
◆쉬포르 쉬르파스 13인 참여 작가
앙드레 피에르 아르날(André-Pierre Arnal), 뱅상 비올레스(Vincent Bioulès), 피에르 뷔라글리오(Pierre Buraglio), 루이 칸(Louis Cane), 마크 드바드(Marc Devade), 노엘 돌라(Noël Dolla), 다니엘 드죄즈(Daniel Dezeuze), 토니 그랑(Toni Grand), 베르나르 파제스(Bernard Pagès), 장 피에르 팽스망(Jean-Pierre Pincemin), 파트릭 세투르(Patrick Saytour), 앙드레 발랑시(André Valensi),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 등이다. 이 중 일부는 작고했으며, 남은 생애 동안에도 일관된 실험 정신을 유지한 이들의 삶 자체가 쉬포르 쉬르파스의 연장선이라 평가받고 있다.
◆인당뮤지엄은?
대구 북구 태전동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은 인당(仁堂) 김윤기 박사가 수집해 박물관에 기증한 장롱과 궤 203점을 비롯해 조선시대 목가구와 유물 5000여 점을 바탕으로 2007년 개관했다. 대구보건대학교 캠퍼스 1만2561㎡ 부지에 녹슨 철판이 감싸 안고 있는 압도적인 초현대식 건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종규 교수의 설계로 세워졌다. 제1전시실부터 제5전시실까지 총 6실로 이뤄져 있으며, 개관 이래 41회의 전시를 기획·후원했다. 방탄소년단 RM이 2021년 ‘이배 작가 기획 초대전’을 관람하며 ‘RM 성지’로도 알려졌다. 관람객은 매년 1만 명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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