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AI 시대의 예술은 여전히 인간의 색을 품고 있다.
권기수의 ‘색죽(色竹), 비선(飛線)’은 대나무를 색으로 세우고, 김범수의 ‘Beyond Cinema’는 빛으로 시간을 붙잡는다. 전통의 숨결과 디지털의 언어가 만나는 그 지점에서, 색은 감정이자 기술이고, 과거이자 미래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 사비나미술관(관장 이명옥)은 전통과 기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두 작가의 개인전을 동시에 선보인다.
2층, 4층에서는 권기수의 ‘색죽, 비선’이, 3층에서는 김범수의 ‘Beyond Cinema: 감성의 재구성’이 열린다.
◆권기수의 ‘색죽(色竹), 비선(飛線)’
전통 동양화의 상징인 대나무와 오방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설치 프로젝트로, 회화·입체·설치 등 총 43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수묵과 필획으로 표현되던 대나무의 관념을 해체하고, 500여 종의 색을 수작업으로 조합한 ‘색으로 된 대나무’를 제시한다.
특히 ‘색죽 프로젝트’는 전통 회화가 지닌 철학과 미학을 인공지능 시대에 재구성 가능한 예술 언어로 확장한다. 수묵화의 흑백 정신을 색채와 구조로 변형하고, 디지털적 조형 시스템과 결합함으로써 동양화는 여전히 살아 있는 예술의 본질임을 입증한다.

4층에는 ‘근원수필 根源隨筆 2008-2024’의 제목으로 권기수 작가가 지난 20여 년간 한국 전통 회화의 근원을 탐구한 작품을 선보인다.
사비나미술관은 “이번 프로젝트는 동양화의 정신적 전통을 해체하면서도 그 본질을 재구성하는 실험으로, 전통 회화가 디지털 시대에도 유효한 예술 언어임을 입증한다”고 밝혔다.

◆김범수의 ‘Beyond Cinema:감성의 재구성’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아날로그 필름을 조형 매체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평면, 입체, 설치 총 36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 ‘Beyond Cinema: 감성의 재구성’은 작업의 방향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작가는 한 편의 영화가 지닌 색감과 정서, 장면의 순간들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며, 서사적·선형적 구조를 가진 영화적 기억을 색면과 구조 중심의 회화적 감성으로 번역한다. 사랑, 갈등, 꿈, 기억 등 주관적인 감정의 순간들은 기하학적 구조와 색채를 통해 부활한다.
그는 35mm, 16mm, 8mm 등 다양한 규격의 폐필름을 잘라내고 배열해 좌우 대칭적 패턴과 원형 구조를 만들었다. 조명과 중첩이 더해진 화면은, 영화의 시간을 멈춘 듯한 회화다.
작품 내부에서 비추는 LED 조명은 필름 속 숨겨진 이미지를 드러내며, 관람객에게 시간여행 같은 몰입적 경험을 제공한다. 폐기된 필름이 회화적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현대미술이 망각된 기억을 소환하고 시대를 재해석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작업은 조형 감각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입체에서 평면으로의 이행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는 오랫동안 입체적 구조와 깊이감을 중심으로 조형적 탐구를 이어왔으나, 이번에는 평면 안에서 입체적 감각을 구현하려는 융합적 시도를 선보인다.
김범수는 “필름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의 그릇”이라며 “사라진 시간의 파편을 회화적 감성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비나미술관 강재현 학예실장은 “김범수의 작업은 매체 실험을 넘어 시간·감정·기억·형식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찰을 담고 있다”며 “조각, 회화, 영화의 형식적·개념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실험을 통해 동시대 미술의 확장 가능성과 새로운 방향을 제안한다”고 소개했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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