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한국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지난 5월 글로벌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장편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의 성공은 국내외에서 “K-애니의 뉴웨이브가 시작됐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그 중심에는 데뷔 초부터 독립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온 한지원 감독이 있다.
최근 뉴시스와 만난 한 감독은 “한국 애니메이션이 더 넓은 세상에 보여지기 시작한, 딱 그 길목에 서 있는 것 같다”며 “제가 앞에 서게 됐다면 영광”이라며 활짝 웃었다.
‘이 별에 필요한’은 넷플릭스의 첫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2050년을 배경으로 화성 탐사를 꿈꾸는 우주인 난영과 뮤지션의 꿈을 접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제이의 이야기다. 감각적 비주얼과 섬세한 연출로 풀어내 로맨스 장르임에도 거대한 세계관을 치밀하게 구축, 국내외 애니메이션 팬층을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메이저 문법’ 추종하지 않은 뚝심
한 감독은 넷플릭스와 작업에 대해 “꿈이 이루어진 기분이었다”며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작품을 해보고 싶었는데 넷플릭스는 정말 많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채널이니까 ‘진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몸을 낮췄지만, 그는 단연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 얼굴이자, K-뉴 애니의 대표 얼굴이다.
“(작품이)글로벌 플랫폼에서 공개되다 보니 K-콘텐츠로 강하게 인식된 것 같아요. 꼭 ‘K’를 위해서라기 보다 메이저 애니메이션들의 사조를 따라가지 않고 저와 저의 크루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더니 새로운 스타일로 받아들여주신 것 같아요. 한국 애니메이션 안에서도 기획력이 좋아지고, 스튜디오 역량도 굉장히 좋아지면서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어요. 해외에서 이를 잘 모르고 있다가 넷플릭스라는 기회를 통해 한지원이라는 ‘샘플’로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처럼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도약에는 창작 생태계의 내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의 출발점 중 하나로 한 감독은 ‘창의인재동반사업’을 꼽았다.
◆창의인재동반사업이 만든 전환점
그에게도 길고 긴 터널과도 같은 ‘지망생’ 시절이 있었다. 그 터널 속에서 함께 걸어가준 게 창의인재동반사업이다.
한 감독은 2010년 단편 ‘코피루왁’으로 서울인디애니페스트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수상 후에도 장편으로 나아가는 길은 막막했다.
“장편 애니메이션까지 가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장편과 단편은 생각하는 방법 자체가 다르고, 사업성도 고려 해야하는데 제가 이전까지 해온 것과 너무 달라 경험자의 조언이 절실했습니다.”
그때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를 통해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창의인재동반사업의 장편 시나리오 개발 과정을 알게됐다. 그는 2012년 1기 교육생으로 참여했다.
이 사업은 2012년 시작된 ‘현장 기반 멘토링 시스템’이다. 웹툰·애니메이션, 게임, 음악, 공연 등 장르별 전문 교육기관을 선정하고 각 분야 전문가를 멘토로 예비 창작자를 멘티로 연결해 작품 개발부터 산업 이해까지 현장에서 요구되는 전 과정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한 감독은 “장편 기획을 하던 프로듀서님이 멘토였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같이 시나리오를 쓰고 예산서를 짜보면서 ‘프로듀서의 언어’를 처음 배웠어요. 그때 처음 읽은게 ‘애니메이션 산업 백서’였죠. 산업구조를 아는게 창작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그는 1년여 동안 장편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했고, ‘당시의 창의인재동반사업이 현실 감각을 깨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멘티에서 멘토로…13년을 이어온 ‘창작의 선순환’
창의인재동반사업은 프로그램 13년 차에 접어들며 멘티가 멘토가 되는 선순환 구조를 갖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한 감독 역시 2019년부터 멘토로 참여해 후배 창작자들과 만나고 있다.
“제가 참여했을 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경험이 쌓였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는 특히 애니메이션 창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라고 강조했다.
“애니메이션은 안정적인 일이 아니잖아요. 세상 풍파를 견디면서 자기 고집을 지켜야하고, 주변에 동료가 없으면 정말 쉽게 고립됩니다. 그때 창의인재동반사업이 울타리가 돼줘요. 그래서 늘 추천하죠.”
멘토링 방식도 단순 강연과 차별화돼있다.
“강연은 제가 말하고 끝나지만, 이 사업은 교육생의 작업을 놓고 일종의 워크숍처럼 교육생이 주체가 돼 소통하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다를 수 밖에 없어요. 또 멘토들이 현장에서 뛰는 실무자니까 현장감도 심어줘요.”
한 감독은 교육생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독립 애니메이션은 힘들어요. 하지만 하고 싶은 걸 중심에 둬야 길을 잏지 않아요. 취향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하고 싶었던 걸 유지하게 돕는게 중요합니다.”

그의 조언을 들은 교육생 중에서 이제 ‘동료’로 마주하는 일도 생겼다. ‘이 별이 필요한’에 실제 스태프로 참여한 이도 있다. 비전공자였지만 창의인재동반사업에서 첫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작품의 페인터 파트에 합류했다.
그는 “이분의 애니메이션 첫 경험이 창의인재동반사업이었다”며 “이 사업이 제대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서 올라와, 빨리 업계에서 만나고 싶다”
이제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많은 이들은 한 감독을 롤모델 삼아 자신의 길을 그려가고 있다. ‘이 별에 필요한’의 성공은 단일 작품의 성취를 넘어, 창의인재동반사업이 구축한 창작 생태계가 K-애니매이션의 도약을 견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창의인재동반사업이 함께 하고, 한 감독의 창의력과 뚝심이 연 “K-애니의 뉴웨이브’의 서문은 더 많은 신예 창작자에게 다음 문을 여는 초대장이 되고 있다.
한 감독은 “저를 보고 꿈을 꾸는 분들은 정말 잘하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며 웃었다.
“왜냐하면 저를 금방 따라잡으실 수 있을거거든요. 너무 멀리 있는 목표는 내가 가까워지고 있는지 티도 안 날 건데, 저는 많은 창작자들과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 있는 목표 지점이에요. 어서 올라오시라고, 빨리 만나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빨리 업계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공동기획: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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