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저더러 프랑스 관객들이 아비뇽의 ‘록스타’라고 하더라고요.”
소리꾼 이자람은 25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열린 ‘2026년 기획공연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 묻자 이같이 답했다. ‘눈, 눈, 눈’은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일꾼’을 판소리로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자람은 “판소리에 대한 편견이 없는 관객들이라 이 예술에 이런 아름다움이 있구나 놀라워하면서 접근했다”며 “소리꾼에게 ‘록스타’라는 호칭을 서슴없이 썼다”고 전했다.
이어 “프랑스에는 관객을 주머니에 넣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관객을 완전히 쥐락펴락하며 매료시켰을 때 ‘퍼포머가 우리를 주머니에 넣었다’고 표현한다”며 “아비뇽 첫 공연이 끝난 후 프랑스 지인으로부터 ‘너는 분명하게 관객을 주머니에 넣어버렸어’라는 극찬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관객들, 부채 펼 때마다 눈보라 소리…한국어로 말했는데 “통했다”
아비뇽 오페라극장 4회 전석 매진의 바탕에는 이자람의 소통 능력과 유연함이 있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불어와 영어를 섞어 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국어 특유의 뉘앙스를 앞세워 언어 장벽을 허물었다.
그러면서 관객을 극에 끌어들인 ‘눈보라’ 연출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눈보라 소리를 부탁하는 중요한 대목에서는 자막에 의존하지 않고 제 입으로 직접 한국말 대사를 했습니다. 공연 중간중간 즉흥적으로 한국어를 써서 ‘감사합니다’, ‘도와주시는 거예요?’라고 말을 걸었는데도 관객들이 그 맥락과 타이밍을 간파하고 호응하더라구요.”
이자람은 또 “제가 직접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극 중 인물이 등장할 때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지는 걸 보며 ‘우리가 언어를 넘어 확실히 통했구나’라고 확신했다”며 “무대가 정말 더웠는데, 불어로 ‘아 너무 춥죠?’라고 농담을 했더니 현지 관객과 물리적, 심리적으로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프랑스 관객 특유의 관람 태도도 언급했다. 이자람은 “셋째 날 공연은 관객들이 너무 조용해서 잘 가고 있나 의심이 들었는데, 연출이 ‘여기는 지적인 게 중요해서 어디로 가는지 엄청 집중하는 것 같으니 믿고 가라’고 해줬다”며 “공연이 끝나자 스프링처럼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더라. 이해하는 속도나 방법은 달랐지만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해외 무대서 서양 고전 잇따라 올리는 이유
‘사천가’와 ‘억척가'(베르톨트 브레히트), ‘이방인의 노래'(가브리엘 마르케스), ‘노인과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이어 이번 ‘눈, 눈, 눈'(톨스토이 원작)까지 서구권 고전을 해외 무대에서 잇따라 올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밝혔다.
한국 고유의 창작물이나 근현대 서사를 활용할 계획이 없는지 묻는 질문에 이자람은 “한국의 근대 소설부터 현대 소설까지는 판소리로 담아내기에 제 피부에 너무 가깝다”며 “판소리는 엄청 가깝게 끌어당기는 방식이라, 아픔을 노래할 때 어떤 감정을 확대하고 엄청 적나라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지 않은 사건으로 판소리를 하면 가치판단을 하게 되고 강요하는 것 같아 과해진다”며 “그 피로도를 관객에게 주고 싶지 않아 먼 고전 소설을 통해 만나는 시기인 것 같다”고 부연했다.
다만 그는 “왜 자주 해외 원작만 하느냐는 짊어지고 갈 숙제인 것 같다”며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얘기를 하고 무대에 서면 하던 대로 창작하겠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작품의 결말이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에 대한 고민도 털어놨다. 이자람은 ‘눈, 눈, 눈’의 탐욕스러운 지주 ‘바실리’ 캐릭터에 대해 “처음엔 제가 싫어하는 권력가들을 이입하며 미워하는 마음이 컸다”면서도 “하지만 외국인 드라마투르그(하워드 블래닝)가 ‘바실리는 대단한 천사가 아니라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인류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줬다”고 회상했다.
이어 “우리는 당연히 인류가 해야 하는 일들을 잃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제가 이 이야기에 공명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비뇽 현지에서 원작 소설을 처음 추천해 준 프랑스 지인이 공연 후 눈물을 흘렸던 일화를 전하며, 무대 예술이 갖는 의미도 짚었다. 이자람은 “우리는 삶을 살면서 지치면 무언가를 잠깐 잃어버렸다가, 말도 안 되는 계기로 다시 찾아 나아가는 일을 반복한다”며 “예술이 하는 일은 그렇게 잃었던 것을 우연한 계기로 찾게 해주는, 우리의 흑백화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잠시라도 컬러로 바꿔주려는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소극장서 대극장으로…”눈보라 포그 겹겹이 쌓을 것”

오는 10월 23~24일 LG 시그니처 홀에서 열리는 재공연은 소극장(U+ 스테이지)에서 대극장으로 규모가 확대된다.
1인극이 대극장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이자람은 “아비뇽 교황청 무대에 섰을 때는 객석 수가 아니라 공간의 거리감이 직관적으로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번 시그니처홀 3층을 열까 고민하며 무대에 섰을 때는 극장이 크지만 ‘모인다’는 감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무대 미학의 확장도 예고했다. “대극장으로 오면서 가장 바뀌는 것은 ‘눈보라’일 것”이라며 “아비뇽 오페라하우스에서 그렸던 포그(안개) 연출을 대극장 스케일에 맞춰 더 넓고 광활하게 펼쳐낼 수 있도록 잘 준비하겠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자람은 판소리가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 가장 큰 힘에 대해 “상상력의 마주침”이라며 “관객의 상상력이라는 엔진을 먹으면서 무대 위에서 존재하는데, 함께 힘을 써서 상상력을 품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시적인지 모르겠다”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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