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나도 한땐 재능 있고 의욕이 넘쳤는데. 제대로만 했다면, 만해 한용운만큼은 했을 텐데….”
‘바냐 아저씨’가 아니라 ‘반야 아재’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고전이 130여 년을 지나 한국에서 새로 태어났다.
지난 22일 개막한 국립극단의 연극 ‘반야 아재’는 체호프의 대표작을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의 조선으로 옮긴 작품이다. 조광화 연출은 원작의 이야기를 일제강점기라는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 인물들의 욕망과 좌절을 풀어 놓는다.
원작의 ‘바냐’의 이름은 이번 무대에서 박이보로 바뀌었다. 그는 반야사에서 수행하던 과거 탓에 극 중 ‘반야 아재’로도 불린다. 박이보의 조카이자 원작의 소냐에게는 서은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보는 조카 은희와 충북 영동의 시골에서 정미소를 지키며 매부 서병후의 경성생활을 뒷바라지해 왔다. 그러나 은퇴한 서병후가 젊고 아름다운 아내 오영란과 시골집으로 내려오며 평온하던 일상도 흔들린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결핍과 문제로 괴로워하고, 엇갈린 감정에 상처 입는다.
한때는 전도유망했던 이보는 중년에 접어들자 자신이 바쳐온 삶이 결국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무력감에 방황한다.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은희는 의사 안해일을 짝사랑하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오영란은 지루한 결혼 생활 속 안해일에게 흔들리고, 안해일은 환자의 죽음 이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기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지는 서병후도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늙어가는 건 끔찍해. 나 늙었다고 다들 싫어할 테지?”라며 초조해한다.
모두가 각자의 상처와 불안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관객에게도 삶의 공허함을 돌아보게 만든다.

앞서 지난 7일 먼저 막을 올려 공연 중인 LG아트센터의 ‘바냐 삼촌’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냐 삼촌’의 배우 이서진과 고아성은 나란히 첫 연극 무대에 도전해, 각각 바냐와 소냐로 분해 익숙한 매력을 살린 연기로 관객에 눈도장을 찍었다.
‘반야 아재’에서는 조성하가 박이보, 심은경이 서은희를 맡아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조성하는 삶의 허무와 울분을 터뜨리는 중년 남성의 얼굴을 묵직하면서도 애처롭게 그려낸다. 한국에서 첫 연극 무대에 오른 심은경은 무기력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붙들려는 은희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서병후 역의 남명렬, 박이보의 어머니 양말례 역의 손숙, 유모 역의 정경순, 몰락한 지주 이기진 역의 기주봉 등 관록 있는 배우들은 농익은 연기로 극의 무게감을 더한다.

다소 모던한 분위기의 무대를 보여줬던 ‘바냐 삼촌’과 달리 ‘반야 아재’는 무대부터 한국적 색채를 전면에 내세운다.
무대 가운데에는 연못과 이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누마루가 자리하고, 뒤편에는 일본식 정미소가 버티고 있다. 오른편 가마솥과 작두 펌프까지 더해지며 1930년대 조선의 풍경을 무대 위에 펼쳐낸다.
1막 중반부터 무대 위에 내리는 비는 인물들의 불안과 흔들리는 감정에 분위기를 더한다. 쏟아지는 비를 말없이 바라보는 박이보의 뒷모습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삶이 허망해도,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원작의 메시지는 이번 무대에서도 그대로 전해진다.
“저세상에서 돌아보면 되죠.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고, 아파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때야 알 거예요. 우리의 지금이, 참 아름다웠다는걸요! 그때 환하게 웃으며 말해요. 그렇게 아파도, 우린 도망가지 않았구나. 살아갔구나.”
이보를 위로하는 은희의 대사와 함께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정미소의 기계 소리는 결국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공연은 3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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