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뉴시스]이재훈 기자 =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은 단순한 쇼가 아니었다. 그것은 긴 호흡으로 관객의 내면을 껴안고 서서히 공감하게 만드는 정교한 심리적 유기체이자, 음악으로 쓴 한 편의 문학이었다.
‘그래미 어워즈’ 2연속 수상에 빛나는 중국계 아이슬란드 싱어송라이터 겸 프로듀서 레이베이(Laufey)가 한국 팬들과 다시 만났다. 지난 7일 경기 고양 킨텍스 제2전시장 9홀에서 열린 첫 단독 내한공연은 4600여 명의 관객과 함께 지나간 시대의 낭만을 오늘의 감각으로 완벽히 복원해 냈다.
이날 현장은 레이베이의 음악이 지닌 사회적 연대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자리였다. 놀(Nol) 예매자 통계에 따르면 20~30대가 74%, 여성이 70%를 차지했다. 이들의 머리카락과 가방, 손목에는 하나같이 정성스레 묶인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이른바 ‘코케트 코어(Coquette Core)’다. 이곳에서 리본은 단순한 걸리시(Girlish) 장식이 아니었다. 흩어지기 쉬운 각자의 불안과 취약함을 기꺼이 긍정하고 서로를 묶어주겠다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연대의 미학적 기호로 작동했다.
공연은 고전 영화풍의 오프닝과 모래시계, 회전목마 등의 오브제가 담긴 영상을 활용해 총 5개의 막(Act)으로 구성된 동화적 서사를 선보였다. 나비 날개 같은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오른 그는 ‘클록워크(Clockwork)’, ‘러버 걸(Lover Girl)’, ‘드리머(Dreamer)’를 연달아 부르며 여름밤의 몽환적인 포문을 열었다.

레이베이는 지난 2024년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기억을 떠올리며 벅찬 소회를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 순간들은 너무 귀여웠고 나는 이 도시와 완전히 사랑에 빠졌죠. 여기서 제대로 된 헤드라인 공연을 꼭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게 돼 정말 행복해요. 아주 먼 아이슬란드에서 왔지만, 이 공간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으니 벌써 가족처럼 느껴집니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음악적 솔직함은 빛났다. 옛 연인을 향한 곡 ‘보어드(Bored)’를 부르기 전 그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제가 만나던 사람을 쳐다보며 아, 넌 참 지루하구나 라고 말했을 때 가졌던 감정에 대한 것”이라며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관능적이고 우아한 재즈 클럽으로 변모한 제2막에서는 ‘심즈 라이크 올드 타임스(Seems Like Old Times)’, ‘밸런타인(Valentine)’ 등이 이어졌다.
투어의 백미인 ‘베스트 드레서’ 선정 시간의 주인공은 객석에 있던 그룹 ‘아일릿(ILLIT)’의 모카였다. 크림색 드레스에 리본을 달고 안경을 쓴 채 객석에 자리했던 그는 최근 건강 문제로 활동 공백기를 가졌으나, 이날 레이베이의 다정한 위로 속에서 마스코트 토끼 메이 메이(Mei Mei)에게 왕관을 수여받았다. 레이베이는 “당신은 정말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며, 당신의 의상 역시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저도 당신의 열렬한 팬”이라며 응원을 보냈다. 모카는 공연 종료 후 위버스에 레이베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남겼다.

3막과 4막에서는 레이베이의 다재다능한 음악적 역량이 폭발했다. 밴드와 현악 편성, 댄서들이 어우러진 뮤지컬적 무대 속에서 그는 직접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하며 ‘캐러셀(Carousel)’, ‘뻐꾸기 발레(Cuckoo Ballet)’ 등을 소화했다. 그는 “처음 쓴 노래 중 하나이며 피아노와 목소리,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했다”며 “첼로를 연주했고, 내 목소리로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기를 항상 꿈꿔왔다”고 회상했다.
공연의 감정적 절정은 ‘가디스(Goddess)’를 지나 ‘스노우 화이트(Snow White)’로 향하는 길목에서 완성됐다. 타인에게 온전히 가닿기 위해 자신의 가장 약한 곳을 기꺼이 열어 보이는 용기. 레이베이는 다음과 같은 긴 독백으로 관객과 내밀하게 결속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감정들, 특히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감정들에 관한 것이에요. 인간은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으며, 음악이 진정으로 그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제 몸에 대한 불안감과 내 야망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곡을 쓰고 싶었어요. 제가 어떻게 느끼는지,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고군분투해 왔습니다. 우리는 분명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하며, 저는 제 안에 있던 감정들을 노래에 담고 세상에 던져서 기분이 나아지기를 바랐어요. 만약 여러분 중 누구라도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다면 정말 유감이지만, 저 역시 이런 기분을 느끼죠.”

거울을 들여다보며 수천 명의 관객에게 자신의 콤플렉스와 불안을 고백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상처를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껴안으며 위로받는 숭고한 순간을 빚어냈다.
공연은 떼창을 이끌어낸 ‘프롬 더 스타트(From the Start)’를 비롯 ‘사보타주(Sabotage)’, ‘러브식(Lovesick)’, ‘레터 투 마이 13 이어 올드 셀프(Letter to My 13 Year Old Self)’로 2시간 동안 약 25곡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낭만을 잃어버린 시대, 레이베이는 다정다감한 언어로 우리 마음의 굳은살을 뭉근하게 벗겨냈다. 최고의 팝 재즈 공연을 넘어선, 가장 아름다운 연대의 밤이었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