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주어짐과 쟁취함 사이 / 증명의 기로 위 남겨진 나.”
그룹 ‘엔하이픈(ENHYPEN)’은 줄곧 햄릿의 형상을 한 뱀파이어였다. 세 번째 월드투어 ‘워크 더 라인(WALK THE LINE)’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주어진 것인가 쟁취한 것인가’를 번민하며 사느냐 죽느냐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그러나 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KSPO DOME)에서 열린 네 번째 월드투어 ‘블러드 사가(BLOOD SAGA)’ 서울 공연 두 번째 무대에서 이들은 기나긴 회의의 터널을 빠져나와 마침내 로미오의 치열한 결단에 가닿았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속해 있던 옛 세계의 파괴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뱀파이어라는 태생적 한계와 억압 속에 갇혀 있던 수동적 소년들은, 이제 오직 ‘너(엔진)’와 함께할 미래를 위해 세상의 차가운 속박에 정면으로 맞선다.
로미오가 “운명아, 나는 너를 거역하겠다”며 기꺼이 가문의 원한을 등지고 독약을 삼켰듯, 엔하이픈 역시 기꺼이 피를 흘리며 운명 자체를 베어버리는 능동적인 낭만주의의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이날 세트리스트는 이러한 ‘투쟁적 사랑’을 증명하는 장대한 서사시였다. 세상의 억압을 찢는 챕터 1 ‘배니시(VANISH)’의 ‘나이프(Knife)’와 ‘아웃사이드(Outside)’로 시작해, 피의 운명을 기꺼이 짊어지는 챕터 3를 거쳐, 미지의 섬에서 우리의 세상을 새롭게 써 내려가자는 챕터 4 ‘로스트 아일랜드(LOST ISLAND)’의 외침으로 이어졌다. 붉은색 조명 아래 흐르는 이들의 퍼포먼스는 단순한 무대가 아닌, ‘너’를 향한 맹렬한 투쟁의 기록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투어는 7인조에서 희승(현 에반)이 탈퇴하고 6인조(정원, 제이, 제이크, 성훈, 선우, 니키)로 재편된 후 맞이한 새 출발이다.
결핍은 자칫 서사의 단절을 부를 수도 있었으나, 이들은 이를 도리어 서사의 심화로 치환해 냈다. 동선과 파트를 전면 수정해야 했던 물리적 상실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무대 위 밀도를 극도로 끌어올리고 멤버 간의 결속을 다지는 강력한 동력이 됐다. “진심이면 상대방도 느낀다. 여섯 멤버 전부가 100% 진심을 쏟았던 공연”이라는 정원의 말처럼, 내부의 뼈아픈 성장통은 이들의 심장에 절박함이라는 붉은 피를 더욱 뜨겁게 돌게 했다.
여기에 ‘뱀파이어 추종자’라는 드레스코드로 붉은색과 검은색 옷을 입고 객석을 채운 엔진들은 이 거대한 세계관을 함께 완성하는 동반자였다. 상실을 연료 삼아 주체적으로 진화한 6명의 뱀파이어는 지금 운명이 던진 가혹한 질문을 넘어서고 있다. 결핍의 계곡을 지나 ‘너’에게로 온몸을 던지는 이들의 ‘블러드 사가’는, 그 어떤 비극의 인물들보다 투쟁적이고 아름다운 영원을 무대 위에서 증명하는 중이다.

투어의 포문을 여는 서울 공연은 선예매 오픈과 동시에 전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전날과 이날을 거쳐 3일까지 사흘 간 세 차례가 열리는데 회차당 1만750명 씩 총 3만2250명이 뭉친다.
이러한 열기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오는 7월 열리는 멕시코시티 콘서트 티켓이 오픈 직후 단숨에 동나며 두 차례 추가 회차를 확정했다. 이 외에도 일본 4대 돔을 비롯한 아시아, 북미, 유럽을 아우르며 21개 도시 32회 공연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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